여수 앞바다 그 섬(경도)에 가면 살살 녹는 하모(갯장어)가 우리를 기다린다
하모 유비키(갯장어 샤브샤브) 상차림 Ⓒ손현철
한여름의 주말 여수, 사람들은 어디로 갈까?
주말 여수 사람들은 앞바다의 섬으로 나들이를 간다. '섬 바람 쐬기'는 여수에서 아주 오래된 전통이다. 충무공 이순신이 쓴 『난중일기』에도 섬 마실 이야기가 나온다.
오백여 년이 지났건만 아직도 그 전통은 끊기지 않았다. 주말에 여수 구도심의 작은 항구 국동항에서 대경도로 출발하는 배편에는 여수 사람들과 관광객들이 가득하다. 이 배를 탄 사람들의 목표는 단 하나. 바로 하모(갯장어)를 먹기 위해서다.(하모는 갯장어의 일본말이다. 참장어라고도 하지만, 여수 사람들은 하모라는 말을 더 많이 쓴다.) 한번 먹어 본 사람들은 부드러운 장어 살점이 슈크림처럼 녹아 내리는 기억을 되살리며 기대감에 부푼다.
여수의 입맛을 바꾼 하모(갯장어)
어쩌다 하모가 여수의 명물이 됐을까? 정약전은 『자산어보』에서 민물장어와 붕장어는 맛이 좋다고 평했다. 갯장어 항목은 그 생김새와 생태에 관해서 길게 썼지만 맛에 대한 평은 단 한 자도 없다. 『음식디미방』 같은 조선의 음식 문헌을 찾아봐도 갯장어에 대한 언급은 없다. 20세기 초까지 우리 조상들은 갯장어를 먹지 않았던 것일까?
하모처럼 하나의 음식이 지역 문화에 안착하는 과정이 잘 드러나는 경우도 많지 않다. 그 경로를 추적해 보자.
일제 강점기부터 여수 경도를 비롯해 인근 고흥만의 어민들에겐 갯장어 잡이가 주된 생계 수단이었다. 통영, 부산 등 남해안의 다른 지역 어민들도 갯장어로 쏠쏠한 돈벌이를 했다. 갯장어가 연안으로 올라오는 5~11월이면 한 줄에 수십 개의 낚시 바늘을 단 주낙선이 바다를 뒤덮었다. 1930년대부터 남아 있는 국내 연근해 어종별 어획고를 보면, 갯장어는 광복 전인 1944년까지 매년 3000~4000톤가량 잡혔는데 전량 일본으로 수출됐다. 한국인들은 갯장어를 잘 먹지도 않았거니와 전부 일본으로 빠져나갔으니 맛을 알 겨를도 없었다.
갯장어 어획량은 한국전쟁이 발발하고 나서 1000톤 밑으로 떨어졌다가 1961년부터 1000톤을 회복했고 1978년에 정점을 찍었다. 1960~1980년 일본의 고도 성장기에 하모 수요가 급증한 것이다. 그 당시 여수 어민들에게 하모는 현찰을 선물하는 캐시 카우(cash cow)였다. 어민들이 잡은 하모를 사들여 일본에 수출하는 중개상들도 쏠쏠한 재미를 봤다. 경도에 최초로 횟집을 연 박동연 사장도 하모 중개상으로 출발했다.
하지만 1992년 일본의 거품경제가 주저앉으면서 하모 수출 가격도 주춤했다. 잘 돌아가던 여수의 하모 경제 생태계에 뭔가 변화가 필요해졌다.
수조 안의 갯장어 Ⓒ손현철
1990년대 이전까지 국내에서는 남해안 어민들 빼고는 갯장어를 거의 먹지 않았다. 어떻게 국내에 하모 수요를 만들까? 하모의 맛을 알게 하면 되지 않을까? 1994년, 박동연 사장은 고향 경도 바닷가에 하모 횟집을 차렸다. 회와 구이로만 먹던 방식에다 일본식으로 살짝 데쳐 먹는 유비키(湯引き, 일본어로 물에 데친다는 뜻)를 선보였다. 얇게 썬 소고기를 끓는 물에 넣고 살짝 익혀 먹는 요리인 샤브샤브 방식을 갯장어에 적용한 것이다.
반응은 좋았다. 1995년에 경도 어촌계가 지역 홍보를 목적으로 갯장어 요리 축제를 열었다. 경도 주민들만 먹던 갯장어를 여수 시민과 인근 지역민, 여행객에게 알리기 시작했다. 주변에 하모 횟집이 몇 군데 더 생겼다. 그리고 십 년이 안 돼 하모가 여수의 대표 음식으로 자리 잡았다.
하모(갯장어)의 참맛은 뭐니 뭐니 해도 유비키(샤브샤브)
이제 갯장어를 맛볼 시간이다. 주방에서는 회 한 접시를 내놓기 위해 칼질이 한창이다. 먼저 갯장어 머리를 못에 고정하고 몸 길이로 반을 갈라 큰 뼈와 내장을 걷어 낸다. 갯장어를 물에 담가 핏물을 뺀 뒤 길게 반으로 나뉘어 납작해진 몸통 두 쪽을 흰 천 위에 놓고 둘둘 감싸서 만다. 긴 방망이 자루같이 말린 천을 수건 쥐어 짜내듯 여러 번 돌려 장어 살의 물기를 천으로 흡수시킨다. 말라서 부들부들해진 몸통을 도마 위에 놓고 회칼로 사선(斜線)으로 잘게 썰어 접시에 담으면 하모 회가 완성된다. 이때 요령은 살과 함께 잔뼈도 같이 써는 것. 눈에 띄게 삐져나온 큰 뼈는 손으로 일일이 골라내야 한다. 그래야 입안에서 씹을 때 이물감이 덜하다.
하모 회를 양념간장이나 초고추장에 찍지 말고 그 순수한 단백질 덩어리를 한 점 집어 입에 넣어 보자. 마찬가지로 뼈째 써는 아나고(붕장어) 세고시(背越し)보다 더 담백하고 야들야들한 느낌이다. 하모는 붕장어에 비해 지방 함량이 반밖에 되지 않기에 더 담백하다. 갯장어 살에는 단백질을 구성하는 아미노산 중 감칠맛을 내는 글루탐산이 가장 많다. 오래 씹을수록 입안에서 감긴다.
하지만 하모의 참맛은 뭐니 뭐니 해도 유비키다. 장어 살을 장어 육수에 살짝 데치는 순간 단백질에서 일어나는 변화가 사람의 혀를 미치게 만든다.
먼저 장어를 해체하고 남은 부산물인 머리, 뼈 등을 넣고 푹 끓여서 육수를 만든다. 반으로 잘라 납작해진 장어 몸통은 회를 뜨기 전과 마찬가지로 천으로 싸서 물기를 뺀다. 장어의 납작한 본체 왼쪽부터 회칼로 3~4밀리미터 간격으로, 살점이 끊기지 않을 정도의 약한 힘으로 칼집을 내며 반대쪽으로 나아간다. 잔뼈가 많은 놈은 이 동작을 한두 번 더 반복한다. 칼집이 난 살은 여러 갈래로 퍼진 꽃잎처럼 보인다. 칼집이 가해질수록 살은 부드러워지고 공기와의 접촉면이 넓어져 숙성이 빨라진다.
살짝 데친 하모(갯장어) 살 Ⓒ손현철
만들어 놓은 육수에 부추, 피망, 버섯, 대추 등을 넣고 끓인다. 육수가 거품을 터뜨리며 부글대면 장어 살 한 점을 살짝 집어넣는다. 연분홍 살빛이 데쳐지며 크림색으로 변한다. 장어 살이 익으면서 아름다운 만곡, 굴곡이 된다. 층층이 벌어진 살집이 꽃받침 위에서 서로 갈라진 꽃잎처럼 보인다. 이때 정신을 놓아서는 안 된다. 꽃잎이 시들기 전에, 아니 장어 살집이 더 굳기 전에 재빨리 건져서 입안에 넣어야 한다. 아, 그때의 느낌이란! 좀 과장해서 표현하자면 입안에서 슈크림이 녹는다고 할까. 하모는 혀와 이에 적당한 마찰감, 저항감을 주면서 녹는다. 잘 익은 고구마를 먹으면 섬유질이 서너 줄 혀에 걸릴 듯 말 듯 자극을 주듯이.
여수에서 하모(갯장어)를 먹을 수 있는 횟집은 어디?
매년 5월 초 거북선 축제에 즈음해서 경도 어민들은 갯장어 잡이를 시작한다. 하모 요리도 대개 5월 초에 개시해서 11월 말까지 내놓는다. 여수에 가기 전 식당에 전화해서 그해 출어 상황을 확인해 보면 좋다.
경도 선착장에서 배를 내리자마자 가까운 곳에 미림횟집(061-666-0044)과 경도회관(061-666-6677)이 있다. 조금 멀리 떨어져 있는 자연횟집(061-666-3236)은 미리 전화해서 예약하면 차를 보내 준다. 하모 회를 맛보려면 전화로 예약을 해 두는 것이 좋다. 손질에 시간이 걸리기 때문에 예약 손님에게만 음식을 내 준다.
배를 타고 나갈 여유가 없으면 여수시 봉산동에 조성되어 있는 참장어 거리 횟집을 찾아가면 된다. 국동항에서 약 500미터 떨어진 부둣가에 하모 횟집이 대여섯 군데 자리 잡고 있다. 돌산대교 바로 아래쪽이라 경치도 좋다.
저렴한 가격에 하모 회나 유비키를 즐기고 싶으면 여수연안여객선터미널 앞 수산 시장이나 수산물 특화 시장으로 간다. 수조에 살아 있는 하모가 들어 있는 가게에서 회를 떠 달라고 한다. 근처 식당을 소개받아 자리를 잡고 맛을 보면 된다. 하모 유비키는 육수를 미리 잘 끓여 놓은 집이 있는지 확인해 보는 게 좋다.
—손현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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